옛 사람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차라리 백리가 힘들더라도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
비록 사흘을 굶을지언정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네.
-18세기 조선시대 독서왕 이덕무의 시이다.

그는 이런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 잡았다고 했다. 이런 무모한 인내와 자기 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않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 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 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 조차 알 수가 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 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거품 경제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갑자기 닥친 잿빛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정말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다. 실용의 이름으로 대학의 지적 토대는 급격히 무너지고, 문화는 말살되고 있다.

취직과 돈벌이와 영어가 삶의 지상 목표로 변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저주받은 세대'라고 되뇌이며 우왕좌왕한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출세를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온 가치와 자존도 송두리째 던져버릴 태세다. 그렇지만 그런가?

그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독서가 지적편식이나 편집적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지적 토대,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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