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있는일

오래 살아도 자기 동내를 다 알진 못한다. 얼마 전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데로 갔다가 뜻밖의 골목을 만났다. 얼핏 기차 한 량을 떼어놓은 것 같은 단층 건물을 대 여섯 개의 가게가 나눠 쓰는데 한 집당 공간이 경이로울 만큼 작았다. 떡집, 도넛집에 닭튀김 집, 국숫집이 있고 가운데에 커피 가게가 있는 ' 이레 봬도 있을 건 다 있는' 조촐한 건물. 워낙 좁다 보니 가게 안에는 주방과 계산대 정도만 있고 탁자는 다 한데 나와 있었다. 집집마다 의자며 파라솔이 다른 와중에 옹색한 공간을 나누느라 의자 궁둥이는 이 집 저 집 가릴 것 없이 죄다 붙여 있는 풍경이 동남아 어디쯤 시장 같기도 하고 좀 크게 벌인 좌판 같기도 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내일 모레쯤 다시 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골목을 기억해 뒀다.

그 주 주말에 걸어서 거길 갔다. 커피 사 마실 돈하고 피츠제럴드 한 권만 들고 갔다. 혼자 있기에 좋은 곳을 찾으면 거기서 책을 읽을 생각에 가슴이 뛴다. 다른 책이어도 상관 없을 테지만, 늘 피츠제럴드를 가져 간다. 민음사에서 나온 피츠제럴드 단편선은 바다에 갈 때마다 하도 끌고 다녀서 책장사이에서 모래가 후드득 떨어진다. 모퉁이마다 삼각형으로 접어논 탓에 위쪽이 불룩한 아코디언처럼 된 그 책을 얼마전 잃어버리고, 같은 걸로 다시 샀다. 피츠제럴드 소설은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좋다. 위대한 개츠비나 밤은 부드러워는 별로 분별 있는 일과 다시 찾은 바빌론, 베르니스 단발을 하다 같은 건 너무 좋다. 그 중 제일 좋아하는 건 단연 컷 글라스 볼이다. 제목만 들어도 펀치볼, 핑거볼, 와인글라스, 봉봉접시, 아이스크림 접시가 깎인 면을 반짝이며 일렬로 서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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