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교토에서 깨닫다

2003년 어느 가을. 일본 냄새를 물씬 느껴보리라 기대에 부푼 채 쏘다녔던 곳 교토. 중국 장안의 바둑판 모양을 모방해 건설되었다는 천년 고도 교토. 떠나와 돌이켜 보니 가슴에 남아 있는 건 눈부시게 금빛으로 빛나던 킨카쿠지(金閣寺)도 아니고, 고색창연하게 단아하던 긴카쿠지(銀閣寺)도 아니고, 모모야마 시대 건축의 전형이라는 니죠죠는 더더욱 아니다.참 어이없게도, 자꾸만 아슴아슴 떠오르는 건, 키요미즈데라 부근에서 잘못 들었던 공동묘지길과 산넨자카 니넨자카, 교토 여행 막바지에 호젓함을 누렸던 철학의 길이라는 걸 고백해야겠다. 어리석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공짜 좋아하는 나는 가끔 본상품보다도 끼워주는 덤을 더 좋아할 때가 있고, 화려한 주인공보다 묵묵히 버티는 조연 배우에게 더 마음이 기울 때가 있다.

긴카쿠지를 구경하고 나온 많은 여행객들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그 무리에 휩쓸려 가다 잠시만 호흡을 가다듬고 뒤돌아 보면, 살짝 비껴나 있는 '철학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 잠시 주춤했지만 또한 그래서 더 가보고 싶기도 했다. 왼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그 너머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오래된 이끼처럼 사랑스러웠다. 5일 동안의 교토 여행에 지친 우리 일생은 저마다 다른 보폭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입도 다리도 지친 터라, 철학의 길에서 저절로 사색에 잠겨 버렸다.


내려다보자니 말갛게 얼굴이 비칠 만큼 깨끗한 실개천엔 푸른 이끼가 물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조용하고 인적 드문 길가에서 느닷없이 맞닥뜨린 자그마한 과자 가게에서는, 사 갈 사람이 아무도 나타날 것 같지 않은 센베 과자를 구워내고 있었다. 마치 천년은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처럼, 교토와 함께 시간을 견뎌온 것처럼 그렇게나 묵묵하고 조용하게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걸지 못하고 한참을 지켜본다. 이 사람이 과자를 살 사람인지 아닌지 계산을 굴려보지도 않는 눈치다. 조촐하게 바구니에 담아놓은 과자가 언제쯤 다 팔릴까 안달하지도 않는 눈치다. 어쩌면 그들은, 저녁 무렵이 되면 미련 없이 가게 문을 내리고, 미처 팔리지 않은 과자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하루를 마감할지도 모르겠다. 평화로움이 연기처럼 내려앉듯 늦은 오후의 오솔길은 그렇게 호젓하고 포근했다.

솔직히 그 즈음 난, 일본 문화에 질려 있었다. 교토 궁궐 수호와 더불어 천황 방문 시 장군들의 숙소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니죠죠는 모모야마 시대 방의 구조나 무사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긴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깔끔하고 간결한 건축물과 단순하고 매끈한 정원을 보자니, 날카로운 칼로 군더더기들은 썩썩 다 처내 버린 비정함마저 느껴진다. 처마 밑에서 울긋불긋 피어나는 우리의 단청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때로 촌스럽다고 느낀 적도 없지 않았건만, 단청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일본에 와서야 진심으로 느끼게 된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금박조차 단청의 찬란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난 킨카쿠지에서 확인했다.

눈 앞에 킨카쿠지가 자태를 드러내는 순간 서양인들은 탄성을 토해내며 발길을 멈췄다. 2층과 3층을 옻칠한 뒤 순금의 금박을 입힌 킨카쿠지는 태양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모습이 과해 다소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 역시 보는 순간 그 화려함에 기가 질려 우뚝 서버리긴 했다. 하지만 돌아와 되새겨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새록새록 기억나지는 않으리라는 걸 벌써부터 예감하게 된다. 우리 단청은 찬란하지만 기를 죽이지는 않는다. 눈부신 듯 소박하고 화려한 듯 친근하다.

교토의 사원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그놈의 '순로'(順路)였다. 어디를 가나 입구부터 출구까지 겹치지 않게 한길을 따라 지나가게 되어 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주춤거릴 때 하얀 팻말에 씌여진 '순로'라는 글씨가 이정표가 되기도 했지만, 잠시 뻗치는 호기심에 다른 길로 샐라치면 그놈의 팻말이 고집스럽게 화살표를 가리키고 있다. 미안하지만 여긴 안돼, 잘난 척 하지 말고 다들 가는 길로 따라 가셔! 꼭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로'는 그래서 한번 지나간 길을 되돌아가는 법 없이 냉정했다. '순로'는 그래서 관광객을 엇갈리지 않게 운반하고 있는 컨베이어 벨트였다. 상당히 경제적이고 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참 인간미도 없다. 앗차, 아까 나 그거 제대로 못봤는데, 싶어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왠지 사람들을 거슬러 돌아가기가 민망해지는 게 바로 그 놈의 '순로'다. 따라서 사진을 찍는 일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있다가 돌아 나올 때 찍어야지 하다가는, 기억 속 앨범에서만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올림픽 금메달 번쩍거리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울려 퍼질 때 가슴 벅찬 애국자가 굳이 아니더라도 내 고국산천 그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정해진 길 따로 없고, 이쪽 까꿍 저쪽 까꿍 앞태 뒤태 맘대로 둘러보다가, 들며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연인끼리 나 잡아 봐라 도 눈치껏 할 수 있는 게 우리네 절집 아니던가.그래도 교토에서 인상 깊었던 곳이 있다면 료안지의 정원이었다. 인공적이라고 해야 할지 자연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지극히 인공적이기도 하고 지극히 자연적이기도 한 카레산스이 정원은 일본식 정원의 극치를 보여 준다. 그 간결함과 단순함과 가지런함이라니.

선(禪)의 경지를 나타내는 '카레산스이 정원'은 물이 없는 정원을 뜻한다. 바다를 상징하는 모래와, 폭포를 상징하는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다. 료안지의 정원을 처음 대하면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나뭇가지가 멋지게 뻗어나가고, 잎들이 울울하게 늘어지며, 철따라 꽃들이 흐드러질  것 같은 그런 풍요로운 정원이 아니다. 줄무늬 가지런한 모래 위에 15개의 돌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모래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알갱이가 제법 큰 마사토 같은 느낌이다. 모래의 물결무늬는 바다를, 흩어져 있는 돌들은 우뚝 솟은 섬들을 연상하게도 한다. 특이한 것은 이 15개의 돌들이 절대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방 어디에서 살피건 15개를 한꺼번에 셀 수가 없다. 여기에 바로 메시지가 있다.


모든 걸 한 번에 손에 넣으려고 하지 마라, 욕심을 부리지 마라.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대청마루에 빽빽하게 앉은 관광객들은 저마다 그 깨달음을 되새기고자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어쩌면 여행에 지친 몸을 쉬는 듯도 하고, 어쩌면 허위허위 달려왔는데 고작 돌 몇 개 던져 둔 정원이라는 것에 실망한 듯도 하고, 어쩌면 이 극도의 간결함에 숨이 턱 막힌 듯도 하고...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저렇게 가지런히 바위 주변을 둘러 물결을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줄무늬를 그려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매일 아침 그것만을 담당하는 관리인이 있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관리를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훈련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 빈틈없는 인공미에 오금이 저려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문득 궁금해진다. 만일 비라도 쏟아지면 어떻게 될까. 모래가 튀면서 골과 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물결무늬를 순식간에 쓸어버릴 것이다.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고, 그리하여 내리는 비는 온 정원을, 아니 온 우주를 뒤흔들게 될 것이다. 인공미가 자연미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멋지지 않은가. 이렇게 인공적인 정원에서 지극한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버스 정류장에서 너무 멀어질 것 같아 '철학의 길'을 끝까지 걸어보지 못한 것은 당시 후회되는 일이었다. 오사카로 가기 위해 우리는 기온으로 가야만 했다. 기온의 거리에는 벌써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거리의 등들이 사이좋게 불을 켜고, 오래고 오랜 가부키 극장에도 커튼처럼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교토의 향기가 내 마음 구석구석 향불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밤, 우리 일행은 기온의 거리를 한참이나 쏘다녔다.

교토에서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아? 하고 친구가 물으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철학의 길'. 이해할 수 없다는 친구의 눈빛이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 나도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많은 여행지에서 어디가 제일 기억나? 하고 물으면 난 서슴없이 대답한다. 교토! 이러한 내가 이제는 교토에서 살고있다. 7년전 느꼈던 교토의 매력에 이제는 전신이 녹아내리고 있다. 어느 누군가가 내게 일본 여행지 추천을 권한다면 난 서슴없이 교토! 라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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