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학벌 대물림 카스트시대 도래


-계층구조 고착되면 경제 역동성 상실
-상위계층 진입쉽게 정책적 노력 필요
중학생 자녀를 둔 세 엄마가 둘러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A씨. "애 성적이 떨어져 걱정이야. 그래서 왜 그 유명한 족집게 선생 있잖아? 그 선생 있는 학원으로 옮기려고…."

듣고 있던 B씨가 한 마디 던진다. "여기서 안되면 빨리 미국 보내. 거기 명문 기숙사학교 보내면 아이비리그 대학도 갈 수 있다더라. 왜 좁게 한국만 바라보고 사니?" 별 말이 없던 C씨,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다독인다. "너도 이번 성적 별로 안 좋더라? 그래도 주눅들지 말고. 남자 애가 담대하게 커야지 그깟 성적에 너무 쫀쫀하게 그러면 되니? 네 앞으로 건물 하나 있잖아. 먹고 살 걱정이야 하겠니?"

한때 시중에 돌던 우스갯소리다. A씨는 별다른 재산이 없는 사무직·전문직 가정의 엄마로 자녀교육에 '올인'한다. 한국사회에서 돈이 없을 때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이라고 믿는다. B씨는 대기업 임원, 고소득 전문직, 벤처기업 사장 등을 남편으로 둔 엄마로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모든 길은 해외유학으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C씨는 큰 사업체를 갖고 있거나 알짜 부동산 부자로 결국은 돈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웃으라고 하는 얘기지만 부모의 부와 직업, 교육이 그대로 자녀세대에게 대물림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에서 일어나 빠르고 역동적으로 성장하던 한국사회가 정체 상태에 빠졌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부모가 초등학교조차 졸업 못해도, 부모가 일자무식에 가난뱅이여도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성공신화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성장이 정체되고 사회구조가 안정화되면서 계층간 벽이 올라가고 있다.

맨 꼭대기 계층에서 아래로 떨어지기도 쉽지 않지만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은 훨씬 더 어려운 계층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 인도의 신분제도였던 카스트처럼 한국사회에서도 경제적 자본(돈), 문화적 자본(교육), 사회적 자본(인맥)이 대물림되는 신카스트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현대판 바보 온달, 현대판 신데렐라는 찾기 힘들다.

월급쟁이 남편을 둔 평범한 중산층 엄마들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친다. 한국사회는 이제 고 정주영 회장처럼 쌀집 점원으로 시작해 대기업을 세울 수 있는 고속성장의 시대도 아니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전 회장처럼 대학을 중퇴하고도 아이디어와 신념으로 성공을 거두는 유연한 사회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고착화된 계층사회는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웨딩섹션은 철저하게 엘리트 계층만을 다루는 지면이다. 신문은 지면에 실리는 인물의 4가지 사항을 강조한다. 출신대학, 대학원 학위, 사회경력, 그리고 부모의 직업이다. 바로 이 4가지가 오늘날 미국의 상류계급을 특징짓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저술가인 데이비드 브룩스의 저서 `보보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같은 계층끼리 결혼은 한국에서도 낯선 현상이 아니다. 한국의 유명 결혼정보업체가 명품 신랑과 신부를 엮어주겠다며 신문에 싣는 광고들은 미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한국에서도 재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위 1%의 결혼을 담당한다는 한 결혼업체는 `골프 치는 사돈은 필수' '가족재산 36억원의 변호사로 배우자 제1조건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집안' 등 광고문구도 지극히 자극적이다.

업체 관계자는 "대부분은 본인과 비슷하거나 본인보다 나은 조건의 상대방을 원한다"며 "회원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밀착관리한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광화문 금융회사에서 비서로 근무하는 한 여자회원은 남자의 직업 외에 남자 측 아버지 직업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여성은 "요즘 강남의 아파트 전세를 얻으려 해도 3억~5억원은 필요한데 전문직 신랑이라도 시댁 도움 없이 그만한 재산을 모을 수 있겠냐"며 "시댁의 경제사정이 좋으면 같은 조건의 남자라도 더 나아보인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결혼, 교육은 신데렐라처럼 재투성이 아가씨를 멋진 공주로 바꿔줄 수 있는 신분 상승의 대표적인 통로였지만 재투성이 아가씨가 멋진 공주로 변할 수 있는 마법은 점점 더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강공주를 만나 번듯하게 성공하는 바보 온달도 현대 한국사회에선 불가능한 전설이 돼가고 있다. 이같이 고착화돼가는 계층구조, 돈과 교육과 인맥으로 대물림되는 신카스트를 깨지 않는 한 한국경제의 역동성과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조건이 정해져 평생 바뀌기 어려운 사회라면 변화를 위한 노력마저 좌절시키며 꿈과 희망을 빼앗는다. 상승할 수 있다는 희망과 상승하려는 욕구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가 다시 뛰기 위해서라도 아래로부터 위로 진입이 쉬워지도록 신카스트 구조를 무너뜨리려는 정책적 노력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2007년 빌 게이츠 전 MS 회장이 34년 만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면서 한 연설은 카스트구조가 뿌리내려가는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진보는 기술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를 통해서든, 양질의 공교육을 통해서든, 훌륭한 보건서비스에 의해서든 불평등을 줄이는 일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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